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주국의 공화주의 (문단 편집) === [[베트남]] === [[프랑스령 인도차이나|프랑스의 식민지배]] 하에서도 [[응우옌 왕조]]의 황제들은 명목상의 군주로 인정받았는데, 그 중 일부 황제들[* [[함응이 황제]], [[타인타이 황제]], [[주이떤 황제]]]은 허수아비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[[독립운동]]에 뛰어들어 구심점 역할을 했다. 그래서 초기의 베트남 [[독립운동가]]들은 상당수가 근왕주의자였으나, [[주이떤 황제]]가 독립운동을 하다 유배된 후에 즉위한 [[카이딘 황제]]와 [[바오다이 황제]]가 [[프랑스 식민제국|프랑스]]의 허수아비 역할에 만족하면서, 구심점을 잃은 근왕주의 독립 세력은 와해되고 공화파가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. [[1945년]] [[일본의 항복|일본 패망]] 이후 권력 공백[* 옛 종주국이었던 프랑스는 아직 베트남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.]이 발생하자, [[인도차이나 공산당]]을 중심으로 한 [[좌익]] 공화파 세력인 [[베트남 독립동맹회]]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8월 혁명을 일으켜 바오다이 황제를 폐위시킴으로써 [[베트남 제국|제정]]을 전복시키고 [[베트남 민주 공화국|공화정]]을 수립했다. 그러나 베트민 정권은 남부까지 장악하는데는 실패했고, 바오다이 황제는 베트민의 [[고문(직위)|고문]] 노릇을 하다가 탈출하여 프랑스의 [[괴뢰국]]인 [[베트남국]]의 군주가 되었다. 덕분에 남부에서나마 베트남의 군주제는 지속되었으나, [[1954년]] [[디엔비엔푸 전투]]에서 [[베트남 인민군]]에게 패한 [[프랑스군]]이 철수를 결정하고, [[우익]] 공화파의 [[리더]]인 [[응오딘지엠]]이 베트남국의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남부의 군주제마저 존폐 위기에 몰렸다. 그리고 응오딘지엠의 주도하에 실시된 [[국민투표]]에서 [[공산당 투표|108.42%의 투표율과 98.91%의 지지율로 군주제 폐지가 확정되고]] [[베트남 공화국]]이 수립되면서, 베트남의 군주제는 완전히 종식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